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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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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루스 차르국의 차르.
2. 생애[편집]
아버지 미하일 1세의 뒤를 이어 16살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매부이자 가정교사였던 '보리스 이바노비치 모조로프'의 섭정을 받았으나 1648년 모스크바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그를 추방하게 되었다. 반란군을 달래기 위해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했는데 이 젬스키 소보르에서 1649년 새로운 러시아 법전을 만들고 농노제를 법제화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 니콘과의 분쟁에서 승리하여 왕권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차르의 개인고문으로써 차르의 통치를 돕게 된다. 1654년에는 코사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원조 요청을 받아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개입하여 대홍수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절반이 넘는 지역을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세력을 회복하여 많은 지역을 다시 내주게 되지만 그래도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 스몰렌스크와 키예프 등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점령하고 폴란드로부터 코사크의 절반을 이탈시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강대국 대열에서 결정적으로 탈락시켰다.
같은 시기에 니콘은 토착화된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를 콘스탄티노플 양식으로 바꿨지만, 옛 전례 유지를 주장하던 세력이 반발하여 러시아 정교회는 구전례파와 신전례파로 나뉘어 다투었다. 한편 시베리아 진출이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 끝에 다다라가면서 1654년~1658년에 나선정벌이 발발했다. 또한 1670년~1671년에는 돈 코사크의 지도자 스테판 라진의 반란을 진압했다.
3. 가족[편집]
두 번 결혼해 첫 번째 아내 마리아 일리니슈나로부터 표도르 3세와 이반 5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공주를 얻었고, 두 번째 아내 나탈리아 키릴로프나 나리시키나로부터 표트르 1세를 얻었다.
4. 평가[편집]
로마노프 왕조의 기초를 다진 차르였으나 상당히 온화했고 몸이 약해서 전체적으로 통치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러시아의 국력을 강화시켰고 끝내 러시아의 숙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대외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러시아의 서구화와 전제정 형성을 주도한 초기 인물 중 하나다. 서구화나 전제정하면 대게 표트르 1세를 떠올리지만 표트르 1세의 개혁이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지 과연 본질적인 변화가 있었지에 대해서는 제정 시대 학자들부터 논란이 분분했고 실제로는 알렉세이 1세가 기반을 마련한 플랜의 급진적인 진행에 불과하다던가 시대의 흐름을 잘 탔을 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1]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알렉세이 1세는 표트르 1세 이상으로 러시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예를 들어 표트르 1세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파벨 밀류코프의 경우 개혁은 러시아 국가 발전 양상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표트르 1세는 단지 그것을 촉진하면서 흐름을 잘 탔을 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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